누군가를 처음으로 사랑하는 것 -정여울

PUBLISHED 2010. 6. 21. 19:37
POSTED IN 보관용


누군가를 처음으로 사랑하는 것
정여울


모든 첫사랑은 저마다의 가슴 속에서 한 번씩은 죽는다. 안타깝게 끝나버린 첫사랑을 위한 가상의 장례식을 치러야만, 첫사랑은 매번 ‘그 다음 사랑’과의 고통스러운 비교대상이 되지 않을 수 있다. 평생 첫사랑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첫사랑의 애도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첫사랑이 이토록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쥐락펴락하는 이유는 첫사랑의 경험이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화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장 어여뻤을 때, 우리가 가장 순수했을 때, 취업이나 내 집 마련을 생각하며 골머리를 앓는 법조차 몰랐을 때, 첫사랑은 시작된다.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 첫사랑의 상처, 그 인류 보편의 고통을 아름답게 그려낸 명작이다.

귀족 집안에서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외아들로 자란 열여섯 살 소년 블라디미르. 그에게 찾아온 첫사랑 지나이다는 처음부터 경쟁상대가 많은 여인이다. 블라디미르의 옆집으로 이사 온 지나이다 주변에는 남자들이 넘쳐난다. 블라디미르의 눈에 비친 그녀는 평생 떠들썩한 파티의 안주인일 것만 같은, 청소나 요리나 빨래 같은 허드렛일은 손끝에도 대지 않을 것 같은 여인이다. 자타공인의 원조 모범생이었던 블라디미르는 지나이다를 만나자마자 공부도 독서도 딱 그만둔다. 머릿속이 온통 지나이다로 꽉 차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첫사랑을 시작할 때 그 여자가 얼마나 재테크에 능한지, 그 남자의 연봉이 얼마나 될지, 그런 현실적인 요소는 잘 따지지 못한다. 첫사랑의 본질적 매력은 ‘현실적 유능함’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우리 마음속 낭만적 환상을 충족시켜주는가’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중요했던 모든 것들이 상투적인 배경화면으로 전락하고, 오직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만이 슬로 모션으로 포착되는 순간. 저마다 아옹다옹 치고받는 현실의 세속적 경쟁이 한순간 무의미해지는 순간. 입학이나 취업을 위한 성실한 자기계발의 노력조차 하찮아지는 순간. 모든 욕망의 화살표가 한 사람의 표정과 말투에 집중되는 순간. 그렇게 첫사랑은 시작된다. 인간이 이토록 강렬한 쾌락을 경험해도 좋은 것인가 싶을 정도로 커다란 기쁨이 찾아오는 순간, 동시에 그 사람을 독점할 수 없다는 현실적 고통이 발목을 붙잡는다. 가장 큰 희열이 시작되는 순간, 가장 큰 고통도 시작되는 것이다.

첫사랑의 아픔, 그 정석(?)은 첫사랑인 동시에 ‘짝사랑’일 경우 더욱 증폭된다. 게다가 그 어긋난 사랑의 화살표를 낚아챈 얄미운 주인공이 자신과는 도저히 경쟁조차 불가능한 사람이라면, 첫사랑은 거의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남긴다. 블라디미르는 지나이다를 사로잡은 남자가 하필 자신의 가장 가까운 남자,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남자인 ‘아버지’임을 깨닫고 소스라친다.

나는 그 사람의 가장 아픈 상처까지 보듬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사람의 가장 치명적인 결함까지 모른 척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미 그 사람은 나아닌 다른 이와 충분히 행복하단다. 내가 그토록 꿈꾸던 사랑이 나를 바라보는 그 여자의 눈빛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그 여자의 눈빛 속에 가득 고여 있다. 블라디미르는 이 고통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 이렇듯 첫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은 그 누구와도 함부로 공유할 수 없는 치명적인 비밀이 태어나는 순간이다.

결국 아버지와 지나이다의 위험한 애정행각은 어머니에게 발각되고, 열여섯 살 소년이 감당키 어려운 ‘어른들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평생 아버지를 짝사랑하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불륜 앞에 광분하고, 두 여자 사이에서 고통받던 아버지는 병에 걸려 죽고, 지나이다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이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다가 죽는다. 부모가 만들어준 아늑한 가정의 둥지 속에서 편안하게만 살아왔던 블라디미르는 자신을 둘러싼 행복이 언제든 하루아침에 붕괴될 수 있는 아슬아슬한 평화였음을 깨닫는다. 철부지 소년은 첫사랑의 혹독한 통과의례를 통해 자신이 발딛고 있는 존재의 토대를,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던 가치들의 붕괴를 목격한다. 그는 단지 첫사랑을 만나고 싶어했지만, 정작 그가 만난 것은 지금의 그를 있게 한 모든 존재들의 삶과 꿈과 눈물이었다. 아버지가 그에게 남긴 유언장은 사랑 때문에 인생 전체를 저당잡힌 한 남자의 피맺힌 절규였다. “여자의 사랑을 두려워하거라. 그 행복, 그 독을 두려워해.”

우리는 그렇게 첫사랑을 통해 세상을 한 번 다 살아낸 듯한 ‘인생의 시뮬레이션’을 경험한다. 누군가를 처음으로 사랑하는 것은 곧 지구를 한 바퀴 다 돌아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우리 안의 수많은 타인을 만나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의 영혼 속에서 우주 전체의 비밀을 발견한 듯한 환상, 그것이야말로 첫사랑의 돌이킬 수 없는 매혹이 아닐까. (정여울 문학평론가)




출처 - 한겨례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2530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