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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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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2011. 11. 23. 01:46
POSTED IN 보관용
데카르트의 프로그램이 본래 자기 파괴적인 이유는, 의심이란 - 그것이 합리적이려면 - 참이라고 믿는 그 무엇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나는 명제 P를 의심한다"라고 말하고 나서, 그 이유를 밝히라는 요구를 받는다면, 나는 다음 둘 중 하나로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Q를 믿는데, Q는 P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든가, "P가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응답해야 한다. 후자의 경우는, P가 참이나 거짓으로 입증될 수 있는 어떤 근거가 있다고 믿는 나의 믿음을 함축하고 있다 두 경우 모두, 나의 의심은 어떤 믿음이 역할을 함으로써만 합리적이 된다. 분명히 믿음과 의심은 앎에 있어서 각각 필요한 역할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의심의 역할도 필요하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이고, 믿음의 역할이 일차적이다. 의심 없이 아는 것은 가능하지만, 믿음 없이 알 수 있는 길은 없다. 지식을 추구할 때 의심을 일차적 도구로 삼으라는 데카르트의 권고는 회의주의에 승리를 안겨 줄 수밖에 없었고, 결국에는 니체의 예견과 같이 허무주의로 귀결되었다. 그 권고가 믿음에 의존하지 않는 그런 유의 명백한 확실성을 요구했고, 결국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절망의 구렁텅이를 피할 수 없었다.

우리는 현재 니체가 예견한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 즉 합리적 논증이 종말을 고하고, 오직 권력과 권력에의 의지가 결정적 역할을 하는 그런 상황 말이다. 근대 유럽 사회의 영광이요 아직도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과학조차도, 더 이상 지혜에 이르는 길, 곧 인간 상황에 대한 참된 이해에 도달하는 길로 여겨지지 않는다. 오히려 권력에 이르는 도구로 여겨질 따름이다.


Lesslie Newbigin,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