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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5.09 3 - 세상속의 그리스도인

3 - 세상속의 그리스도인

PUBLISHED 2012. 5. 9. 12:48
POSTED IN 매일매일

2012.05.09


어제는 김동춘 교수님의 수업이었다. 학교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분위기 때문에 한 시간 정도를 늦고 말았다. 느헤미야 수업을 이렇게 많이 늦어본 건 처음이다. 어제 수업은 ‘세상속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주제였는데, 신학자들에 의해 나누어진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여러 유형에 대해서 공부했다. 


리처드 니버(Richard niebuhr)가 나눈 그리스도와 문화의 다섯 가지 유형에 대해 가장 먼저 다룬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그 부분을 지각으로 듣지 못했다. 교수님께서 정리해놓으신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1)분리유형: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Christ against Culture), (2) 일치유형: 문화의 그리스도(Christ of Culture), (3)종합유형: 문화위의 그리스도(Christ above Culture), (4)역설유형: 문화와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Christ and Culture in Paradox), (5)변혁유형: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Christ Transformer of Culture). 리처드 니버의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 앨리스터 맥그래스의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를 볼 때, 한번 보았던 이야기여서 아주 새롭지는 않다. 그러나 하나하나 설명해보라고 하면 구체적으로는 힘들고, 특히 ‘역설유형’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그 다음 페이퍼에는 로버트 웨버(Robert E. Webber)의 3모델, 분리모델(Seperation Model), 동일모델(Identification Model), 변혁모델(Transformation Model)이 쓰여 있는데, 이 설명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런데 이후에 이어지는 논문은 아마 이 모델을 기초로 쓰신 것 같다. <분리모델>, <적응모델>, <변혁모델> 이렇게 세 모델로 나누어 서술이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이 세 개의 모델 중에서 지금까지 내 안에서 추구되어왔던 모델은 ‘분리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안 공동체로 세상과 다른 질서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꿈을 꿔왔기 때문이다. 분리모델의 예에서는 초대교회, 대안공동체, 재세례파 등이 언급되어있었는데, 평소에도 이들에 마음이 갔던 게 사실이다. 반면에 적응모델의 루터의 두왕국설은, 현실적이기는 하지만 호감(?)이 가지는 않았다. 특히나 ‘두 얼굴의 그리스도인’, 즉 두 왕국을 오가며 살기 위해서는 ‘가면’이 필요하다는 부분은 오늘날의 부작용을 보아왔기 때문인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변혁모델은 기독교 세계관 운동과 연결이 된다. 이는 모든 세계에서 그리스도의 우주적 통치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잘못하다가는 승리주의나 정복주의로 흐르게 될 위험이 있다. 그래서 교수님께서는 영역주권론을 설명하셨는데(검색을 해보았더니 아브라함 카이퍼가 영역 주권론에 대해 말한 것 같다.), 이는 세상의 모든 영역들이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리스도를 드러나게 말하거나 기독교적 의식을 행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영역의 본질적이고 고유한 목적에 충실한 것을 말한다. 예컨대 문학이라면 성경이나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게 아닌, 문학이 할 수 있는 본질적 역할에 충실한 것이 영역의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태도라는 것이다.   


여기서, 각 영역의 본질적이고 고유한 역할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지?라는 의문이 생겼다. 말씀이 그 근거일 것이라는 짐작은 하지만 언급되지는 않았고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것 처럼 이야기가 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면 모두가 창조의 의도와 목적에 맞는 자연스러운 모습이 있다. 이는 과학, 문학, 정치, 경제, 역사 등의 영역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영역주권론'이라는 개념으로 이를 말하고자 했던 것 같다. 기독교 세계관을 접할 때는 당연히 이런 관점을 가졌었다. 단지 교수님은 세계관 운동의 왜곡, 그 위험성을 우려하는 입장에서 이와 같은 설명을 하셨을 것이다.  

 

그보다 우리나라에서 기세운동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창조-타락-구속의 도식의 세계관 운동은 기독교 전체를 포괄하는 세계관이 아니다, 재세례파의 세계관도 있고, 루터의 세계관도 있는 것처럼 그와 같은 창조-타락-구속의 세계관도 여러 세계관 중의 일종이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이라기보다는 reformed worldview 일 뿐이다, 게다가 이는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시하는 역할을 했지만 실제로 세계를 변화시키는 동력은 부족했다, 등의 내용이었다. 아마도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거리를 두어 볼 수 있는 시각의 단초를 제공받은 것 같다. 


분리모델, 적응모델, 변혁모델. 그리스도를 함께 주로 모시면서도, 역사 속에서는 이렇게 다른 모습들이 등장해왔다. 그리고 모든 모델이 양면성이 있다. 말씀에 충실한 듯 보여도 이면에는 또 한계가 있는 것이다. 내가 살아갈 모습을 찾는 것이 ‘정답’을 찾는 과정은 아닐 것이다. 각자가 다르고, 각자에게 주어진 길이 다르다. 누군가는 세상과 분리된 상태로 일종의 대안적 모델로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세상의 영역 속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구현하기 위해 살아갈 수도 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완벽한 삶을 살 수는 없다. 


내가 가야 할 구체적인 길을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 길을 찾아나가고 또 살아가는 데 치열하기를 바란다. 완벽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참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분투하는 그 치열함 속에서 깊은 기쁨이 있음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