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과 현실 사이, 애정촌

PUBLISHED 2012. 1. 15. 11:01
POSTED IN 문득 떠오르는

애정촌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결혼을 목적으로 짝을 찾는 남자와 여자가 이곳으로 모인다. 그들은 애정촌에서 6박7일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낸다. 주어진 시간동안 다른 고민들은 다 접어두고 오로지 자신의 짝 찾기에만 몰입한다. 게다가 생활하는 동안 모두가 동일한 옷을 입어야 한다. 자기의 고유 이름도 잠시 잊는다. 남자 1호, 여자 1호 와 같은 아라비아 숫자가 이름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SBS의 다큐멘터리인 <짝>의 상황설정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직장, 가족, 친구, 문화생활, 하다못해 개 밥 챙기기 등, 챙기고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일상의 모든 일들을 접어두고, 오직 ‘짝짓기’에만 몰두하라니. 이곳에 모인 인간들은 서로 다른 성(性)을 향한 본능 밖에 없는가? 짝짓기를 위해 경쟁적으로 구애하는 동물의 왕국과 무엇이 다른가? <짝>을 처음 보았을 때는 조금 불편한 느낌이었다.

애정촌의 남자와 여자는 사람의 관계 맺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버림받는 것이 두려운 남자1호는 끝까지 두 명의 여자를 두고 저울질을 한다. 미모가 무기인 여자 1호는 자기에게 구애하는 남자들을 교묘하게 휘두른다. 여자의 태도에 화가 난 남자 6호는 마음에도 없는 사람에게 구애하는 척 하며 여자1호를 테스트한다. 지금껏 이성을 20~30명 만났다는 남자2호는 순간의 즐거움으로 사람의 매력을 판단한다. 모든 노력과 시간을 써가며 자신을 희생한 남자4호는 왜 자기를 알아주지 않느냐며 울먹거리지만, 그는 상대방의 마음을 들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못했다. 도시락을 함께 먹고픈 상대로 아무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여자3호는 눈물을 터뜨리고 만다. 

운명적 만남에 대한 환상을 품고 젊은 남, 녀는 애정촌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진 6박7일은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알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처절하게 체험하는 현실이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그 어느 때 보다 가까이 경험하는 시간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샤방한 얼굴로 애정촌에 들어왔다가, 결국 마지막 날 잿빛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선택을 포기한다. 그만큼 현실은 환상과 같지 않다. 짝을 찾는 것은 꿈처럼 아름다운 일만은 아니다.

우리는 흔히 ‘이야기’와 같은 현실을 꿈꾼다. 기적 같은 사랑, 운명적인 만남! 70억을 가진 왕자님과, 이하늬 같은 외모의 공주! 나에게 “올인”, 한번 정한 마음은 흔들리지도 깨지지도 않는 굳건한 반석! 적어도 내 인생만은 해피엔딩이겠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달콤한 이야기들은 드라마로, 영화로, 소설로 유통되며 우리에게 우리의 삶도 그럴 수 있다는 꿈과 환상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현실은 결코 이야기가 아니다. 마음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쪽저쪽으로 흔들린다. 별 의미 없는 친절을 나에 대한 호감으로 착각한다. 더 알아가고 싶다는 호감을 영원한 사랑에 대한 확신으로 확대 해석하기도 한다. 말과 행동은 미숙하고, 경쟁자의 방해는 멈출 줄 모른다. 마음을 전하는 것이 죽도록 힘들다. 관계는 삐그덕댄다. 거절의 두려움이 엄습해서 앞이 깜깜하다. 여기저기서 어긋나고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짝>의 애정촌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애정촌’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짝>을 보며 여전히 로맨스를 기대하고 한 사람만 바라보는 순정남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사람은 환상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든 종족일까? 꿈꾸지 않으면 현실을 살기 힘든 걸까? 문득, "이 나이 먹도록 운명을 만날 것이라며 마냥 기다렸어요. 한마디로 미친 거죠."라는 서른다섯 살의 학원 강사 남자 7호의 말이 떠오른다. 시니컬한 현실 인식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음 한구석의 금빛 환상을 지우지 못하는 나는, 로맨티스트인지, 아직도 철이 들지 않은 건지. 오늘도 나는 환상과 현실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애정촌을 살아간다. 


2012.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