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탈리즘으로 잘 알려진 학자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서양과 동양의 구분을 만들어 낸 인식체계의 기원과 발전 등에 대해 연구했다. 그에 따르면 서양은 동양을 자기에 비해 '후지고 약한' 대상으로 생각했다. 그 관점은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자료들의 축적에 의해 점점 견고해졌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연구의 대상이 실제적인 동양이 아닌, 서양이 ‘원했던’ 동양이었기에 동양에 관한 지식은 ‘구성되고 만들어진’ 일종의 표상체계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서양이 암묵적으로 품고 있던 동양에 대한 우위의 태도, 동양을 힘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에 의해서였다.
지식은 당연히 사회와 문화의 구조와 별개가 아니다. 그런데 사회를 지탱하는 구조나 제도는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과 연관이 있다. 인간은 구조나 배치에 수동적으로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다. 같은 조건에 있다 해도 서로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의지가 인간에게 있다. 나치의 수용소를 경험했던 정신과 교수 빅터 프랭클은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죽음이 극도로 가까운 그 상황에서도, 인간은 ‘돼지’가 될지 ‘성자’가 될지 양자 사이에서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고 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를 결정지우고 있는 조건(역사, 사회, 경험 등)속에서 나름의 생각을 구성하고 표명하고, 또 그러한 조건들을 지속적으로 갱신해간다.
때문에 우리가 지식을 접할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은 '무엇'이라기보다 '누구'인 것 같다. 모든 지식의 생산과 구성은 고유한 주체에 의해 이루어진다. 지식이 만들어지게 된 토대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그것이 핵심이다. 그 누군가의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관점과 (실천적)입장(어떤 경험과 환경 속에 있는지, 성향은 무엇인지, 인간과 자연에 대한 가치관이 무언지, 도덕과 윤리의 기준을 무엇으로 삼고 있는지 등)이 지식의 목적과 내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서양의 동양 지배를 더욱더 견고하게 만들었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지식체계의 '구성'도 서양인들 속에 동양을 지배하고자 했던 어떤 ‘인격’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지식은 곧 인격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가능하다.
지식이 인격이라면 분명한 도덕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인격은 그 내용이 무엇이든 나름의 도덕과 윤리의 질서위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들은 지식의 인격적 특성과 도덕성에 주목하지 않는다. 지식이라는 딱지를 붙인 생각은 마치 객관성을 보장받은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파괴와 전쟁, 불평등, 압제 등과 같은 비극적인 일들이 너무도 명백히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현실은 특정한 지식, 그리고 그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의 실천은 앎을 따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무작정 지식을 재생산 하기 이전에, 그 지식이 누구에 의한 것인지 묻는 것, 그리고 그 누군가의 인격의 총체인 ‘마음’을 살피는 일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지극히 개인적 이야기와 함께 파생된 생각의 일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