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떠오르는

조직신학 첫번째 시간

chae. 2012. 5. 2. 18:40

2012.05.02


조직신학이라는 단어를 신학생들의 입에서, 그리고 서점의 책에서 보아왔긴 했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랐다. 신학생들은 대부분 그 단어와 함께 괴로움을 토로했다. 서점의 책은 무서우리만큼 두꺼웠고 표지 디자인도 고리타분했다. 그래서 자세히 알기위한 시도를 하지 않았었는데, 무엇보다 ‘조직’이라는 표현에서 느껴지는 딱딱함도 이에 큰 몫을 했던 것 같다. 이처럼 평소 그다지 호감을 갖지 않았던 조직신학을 느헤미야에서 직접적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점에 꽂혀있던 그 두꺼운 책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책과 함께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교수님의 설명을 들으며 핸드아웃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얼마 안가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님과 세상과 인생의 의미와 서로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추구 하는 것.” 신학에 대해 종합적인 정의를 내린 문장이었다. 약간의 놀람과 반가움이 찾아왔다. 평소 내 나름대로 공부라는 것에 대해, '세상을 이해하고 인간을 이해하고 서로의 관계를 이해함으로써 어떻게 살아갈 지 고민하는 것'이라고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는 이 세상을 만들고 주관하는 존재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그 종합적 이해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이곳(느헤미야)까지 찾아오게 된 것이었다. 때문에 신학에 대한 이 정의를 읽고 마치 번지수를 제대로 찾아온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그에 더해 성경신학·역사신학·조직신학·실천신학과 같이 신학의 분류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보는 것은 신학이라는, 아직까지 모호한 덩어리를 조금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 중 조직신학은 신론·인간론·죄론·기독론·구원론·교회론·종말론과 같은 큰 주제에 따라 성경의 내용을 정리한 신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러한 틀을 제대로 세워서 말씀을 보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지금 내게 주어지는 가르침과 믿음을 비판적으로 돌아보고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에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하는 신학의 역할, 과제를 알게 된 것은 지금 내가 이곳에서 공부를 하는 것이 무의미 하지 않다는 걸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했다. 


사라지지 않고 가슴 속에 몰래 숨어 있다가 시시 때때로 불쑥 튀어나와 나를 괴롭게 하는 질문,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 질문 앞에만 서면 괜히 무력해진다. 지금 내 삶의 보잘 것 없음을 보게 되고 앞으로의 길 또한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작은 몸짓이라도 조금씩 애쓰다보면 답이 보일까? 그 답처럼 살게 될까? 느헤미야의 조직신학 공부 시간이 그 질문의 진심어린 친구가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두 번째 시간을 맞이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