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떠오르는

“너를 ‘보고’싶어”

chae. 2011. 8. 30. 10:20

“너를 ‘보고’싶어” 
-영화 <이창>과 <타인의 삶>의 ‘훔쳐보기’를 통해 본 사랑의 가능성


훔쳐보기

삶을 간단하게 보자면, 명료하게 보이는 층위와 감추어지는 층위로 나누어진다. ‘겉과 속이 다르다’라는 표현이나, ‘가면’이나 ‘이면’이라는 단어, 남을 속이는 ‘거짓말’, ‘사기’등의 행위는 우리 삶의 전반에 깔려있는 ‘드러남과 감춤’이라는 이중적 구조를 알려준다. 무언가를 몰래 관찰하는 행동인 <훔쳐보기>는 드러남과 감춤, 두 개의 층위 중 후자에 속하는 행위이다. 훔쳐보기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언제나 ‘몰래’ ‘은밀하게’ ‘들키지 않고’ 행해진다.

훔쳐보기는 부하 아내의 목욕장면을 엿본 고대의 다윗 왕 이야기에서부터 여대생 화장실 몰카와 같은 버전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삶과 꾸준히 함께 해왔다. 그리고 현대의 기술의 발달은 훔쳐보기가 더욱더 은밀하고 정확하게 이루어지게 해주었다. 예컨대, 통신의 발달로 눈부신 활약상을 펼쳤던 도청기술은, 귀라는 감각기관을 이용하긴 하지만 훔쳐보기와 같은 맥락이다. 점점 줄어가는 몸집에 더 섬세한 기술로 무장해가는 카메라는, 무언가를 들키지 않고 생생히 담는데 최고의 도구가 되었다. 게다가 익명성을 기반으로 한 인터넷 세상에서는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의 흔적을 몰래 관찰하는 것이 아주 쉽다. 우리의 도도한 이성은 훔쳐보기를 나의 삶에서 동떨어진 곳에 위치시키려 하겠지만, 삶의 한 꺼풀을 들추어보면 너나 가릴 것 없이 곳곳에 자연스럽게 자리한 훔쳐보기의 흔적이 발견될 것이다.

영화 <이창 rear window>(1954)과 <타인의 삶 The lives of others>(2006)은 그러한 우리의 현실을 이야기로 다시 만들어 건네고 있다. 두 영화 사이에는 50여년이라는 꽤나 긴 시간의 골짜기가 놓여있지만 ‘훔쳐보기’로 인해 둘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영화 <이창>과 <타인의 삶>의 훔쳐보기

<이창>은 뉴욕의 아파트에서 일어난 이야기다.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하고 휠체어에 앉아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사진작가 제프리스가 주인공이다. 집안에 갇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는 이웃의 삶을 훔쳐보며 무료한 시간을 때우고 있다. 항상 옷을 ‘간단히’ 걸치고 춤을 추는 댄서, 잔디 위 벤치에서 쉼을 즐기다가 가끔씩 작품에 손을 대는 조각가 부인, 베란다를 주거 공간으로 삼고 살아가는 부부, 혼자 살며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는 미스 론리, 방 가득 커다란 피아노를 두고 음악을 들려주는 작곡가, 아픈 아내와 그녀를 매일매일 돌보고 있는 남편. 이상이 그에게서 훔쳐보기를 당하고 있는 이웃들의 목록이다. 자신 앞에 뚫린 하나의 창문이 이웃들의 오색찬란한 삶을 관찰하는 통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그의 평화로운 훔쳐보기의 성격이 급격하게 변하게 된다. 병든 아내를 돌보던 남편을 그가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내가 항상 누워있던 방의 침대 옆 창문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고, 새벽에 커다란 가방을 들고 나갔다 오는 남편, 여러 개의 기다란 톱, 화장실 벽을 닦는 남편의 모습이 그의 레이더망에 하나둘씩 포착되었다. 제프리스는 이상한 남편의 행동에서 ‘살인’을 연상하게 된다. 이로 인해 그의 훔쳐보기가 이전과 다른 양상을 띠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영화인 <타인의 삶>은 1984년의 동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의 동독은 국가의 비밀경찰이 국민의 삶을 철저히 감시하고 통제했다. 이 때 동독 최고의 극작가 드라이만과 그의 연인인 여배우 크리스타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은 비밀경찰이 주인공인 비즐러이다. 국가를 향한 흔들리지 않는 충성심과 뼛속깊이 박힌 신념을 가졌던 그는, 국가의 질서에 조금이라도 반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예외 없이 단죄해가는 냉혈한이었다. 그는 이러한 신념으로 드라이만과 크리스타를 감시하는 일을 자처하게 된 것이다.

비즐러는 도청장치로 가득 찬 차갑고 캄캄한 창고 안에서 하루의 반을 꼬박꼬박 머무르며 그들의 움직임과 대화를 면밀히 포착하고 기록해 간다. 그러던 중 그가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감시 대상의 집에서 브레히트의 시집을 훔쳐서 읽고, 드라이만의 소타나 연주를 엿들으며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게다가 보고서도 허위로 작성함으로써 일어난 일을 은폐시켜준다. 비즐러는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진실한 사랑과 인간애, 생(生)에의 열정이 넘실대는 대본 없는 연극을 ‘관람’하다가 예기치 못하게 자신의 변화를 맞이한 것이다.

 


훔쳐보기의 도약

우리는 바로 곁에서 사람이 죽어가도 모르는 한편 다른 사람의 신상을 터는 일에 온 힘을 쏟기도 하는 현실에 살고 있다. 미치도록 무관심한 모습과 미치도록 관심이 많은 모습이 공존한다. 이 극단적인 양극 사이에 ‘훔쳐보기’를 놓아볼 수 있다. 대놓고 ‘무시하지도’ 않고 대놓고 ‘털지도’ 않는,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가늠하기 힘든 애매모호한 태도. 이 애매모호함의 이유는, 행위는 계속되지만 행위의 주체가 마치 죽은 듯 감추어져 있는 상황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숨죽인 주체가 조금씩 고개를 내미는 때가 찾아온다. 그 때가 바로 훔쳐보던 제프리스와 비즐러의 변화가 시작된 때이다. 살인을 확신했던 <이창>의 제프리스와 그의 연인 리사는 살인 용의자에게 편지와 전화로 접근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그의 집에 직접 침입하는 용기까지 내게 된다. 한편 <타인의 삶>의 비즐러는 드라이만과 그 친구들의 모의(동독의 자살률에 대한 기사쓰기)를 뻔히 보고 들으면서도 묵인한다. 그것도 모자라 직접 증거를 숨겨주는 적극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어두운 아파트 방안의 렌즈를 통해, 폐쇄된 방의 기계를 통해 이루어지던 각각의 훔쳐보기가 갑자기 ‘도약’을 시작한 것이다. 렌즈 뒤의 어둠 속에서 살인 용의자의 집으로, 모니터와 도청장치 앞에서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삶으로!

‘보기’는 현실의 변화를 가지고 오지 않는 점에서 수동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보기’는 변화를 일으키는 적극적인 ‘행동’을 불러내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제프리스와 비즐러는 은밀하게 시작된 훔쳐보기를 통해서 전혀 관계가 없던, 혹은 적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타인의 삶에 개입하게 되었다. ‘봄’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도약이 일어났다. 여기서 ‘사랑’을 떠올리는 게 가능해진다.


사랑으로

굳이 다른 이의 삶에 개입하는 이 행동은 현대의 폐쇄적 개인주의나 효율성의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기에도 빠듯한데 다른 사람의 삶까지 신경 쓰는 것은 괜한 오지랖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잔뜩 쌓여있는 업무, 숨을 조여 오는 상사, 뒤처지는 두려움에 붙잡고 있는 스펙을 위한 공부, 떼려야 뗄 수 없는 정서적인 외로움. ‘나’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벅찬 현실이다.

그러나 사랑은 개인주의나 효율성의 원칙에서 비껴간다. 사랑은 자신의 영역을 타인에게 무한히 개방시키고, 타인에게 자신의 시간을 무한히 낭비하게 만든다. 타인을 위해 원칙과 한계를 무시하거나 뛰어넘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이창>의 제프리스는 분노에 차 자신의 집으로 찾아온 살인자와 맞붙어 깁스 투혼을 벌이다가 나머지 다리마저 부러지는 불상사를 겪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을 내던짐으로써 형사인 친구도 발을 빼던 살인 사건의 범인을 결국 밝혀내었던 것이다. <타인의 삶>의 비즐러는 국가의 반동분자에 대한 공모혐의로 비밀경찰의 신분에서 우편관리 업무를 담당하는 지위로 강등 당한다. 시간이 흘러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극작가 드라이만은 당시의 상황을 책으로 출판하게 된다. 그리고 드라이만은 자신의 삶에 기꺼이 개입해준 비즐러에게 그 책을 바치게 된다. 안전을 무릅쓰고 지위와 명예를 포기하기까지 하며 다른 이의 삶에 개입하는 제프리스와 비즐러의 행동에서 바로 ‘사랑’의 향내가 아른거린다.

사랑의 기술을 주장한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은 받는 것 보다 주는 것과 연관이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른 이에게 무언가를 준다는 것이 단순히 자기를 포기하는 희생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주는 것 의미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그는 줌으로써 다른 사람의 생명에 무엇인가 야기하지 않을 수 없고,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의 생명에 야기 된 것은 그에게 되돌아온다. 참으로 줄 때, 그는 그에게도 되돌아오는 것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준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주는 자로 만들고, 두 사람 다 생명을 탄생시키는 기쁨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제프리스와 비즐러는 바로 이 기쁨을 느낀 게 아니었을까? 


꿈꾼다

무심코 올라탄 지하철의 옆자리 사람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에게 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그의 삶을 세밀히 들여다보게 되는 기회가 생긴다면 그 사람은 나에게 완전히 다른 존재로 탈바꿈할 것이다. 보는 것은 타인을 아는 것으로 이어지고, 알게 된 후에는 그를 위한 어떤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일어난 사람들 간의 단절과 폭력은 어쩌면 서로를 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파괴와 고통의 끔찍한 기억들을 인류의 역사에 주저함 없이 아로새겼던 사람들이, 만약 한 가정을 먹여 살리기 위해 수고하고 애쓰는 가장의 땀을 보았다면, 엄마의 젖을 물고 있는 아이의 순수한 눈빛을 보았다면, 사랑을 하고 있는 젊은이의 뜨겁고 아름다운 마음을 보았다면, 지금 우리에게 조금 다른 세상이 찾아오지 않았을까? 보지 않는 자보다 보는 자에게서 사랑의 가능성을 본다.

훔쳐보기, 그 은밀한 유혹이 사랑을 불러내는 실마리가 되기를 꿈꾼다.



2011.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