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르

PUBLISHED 2013. 2. 6. 14:45
POSTED IN 문득 떠오르는




영화 <아무르>를 보았다. '사랑 그 자체인 영화'. 아무르를 설명하는 짧은 문장이었다. 사랑이 뭘까? 이 영화는 사랑을 어떻게 그리고 있길래 사랑 그 자체라는 표현을 한 것일까?

영화는 사랑 이야기지만 또한 죽음의 이야기였다. "모두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류의 이야기가 아닌, 모두는 사랑하며 살지만 그 모두는 언젠가 죽고 맙니다."의 이야기. 우리는 사랑의 시작을 보는 것을 즐거워 하지만 그 끝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우리가 보지 않으려 하는 끝. 그것도 현실에서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완전한 끝, 죽음을 보여주었다.

맞다. 사랑은 언젠가 끝난다. 의지적으로 끝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결국에 죽음이 그 사랑을 끝내게 한다. 우리의 곁에는 마치 굶주린 사자 같은 죽음이 사랑을 집어삼키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며 항상 생각하고 갈망하는 사랑은, 우리가 기피하지만 겪을 수밖에 없는 죽음에 의해 끝이난다.

사람에게 찾아오는 죽음의 모습은 언제나 끔찍하다. <아무르>는 사람이 죽음을 향해가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정신을 놓고, 수술을 하고, 몸의 한쪽은 마비가 되고, 혼자 움직일 수도 밥을 먹을수도 없게 되고, 침대에 오줌을 지리고, 말을 하지 못하게 되고, 곁에 있는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져간다. 급작스럽게 사라지든 서서히 사라지든 사라지는 것이다. 이처럼 죽음이 반드시 찾아올텐데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한다. 왜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사랑을 해서 일부러 끝의 고통을 겪을까? 항상 죽음을 생각하며 사랑하면 조금은 고통이 덜할까? 그러나 그 두려움이 지금의 사랑을 불행하게 만들면 어쩌지? 죽음이 없는 것 처럼 사랑하는 것은 어리석을까?

c.s.루이스는 사랑하는 조이를 암으로 잃고 나서 쓴 일기 <헤아려본 슬픔>에서, 죽음이 사랑의 자연스러운 한 단계라고 했다. 하지만 죽음은 여전히 낯설다. 죽음이 자연스럽고 익숙해질 때가 오리라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자연스러운 단계라 말한 루이스도, 죽음의 슬픔 속에서 어찌할바를 몰랐다는 것을 그의 글을 보면 알 수있다.

사랑과 죽음, 그 불편한 조합 앞에서 '사랑 그 자체'라는 표현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감히, 그것이 사랑이라 말하며, 또 어떻게 감히,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 말할 수 있을까? 사랑이 주는 기쁨과 사랑의 사라짐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서 하루에도 몇번씩 오락가락하는 미숙한 나는, 무엇이 사랑인지 잘 모르겠다. 정말로 모르겠다.


2013.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