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8일

PUBLISHED 2013. 12. 30. 10:29
POSTED IN 매일매일

2012년 12월 28일.. 지금으로부터 일년 전의 글이다. 페이스북 이전 글들을 보다가 눈에 들어왔다. 읽어보니 마음에 들어서(?) 다시 포스팅 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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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나올 때 톨스토이의 단편집을 챙겼다.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그 중 <바보이반>을 읽었다. 작가가 궁금해져서 친절한 네이버캐스트의 톨스토이에 대한 간단한 글을 읽어보았다. 눈에 띈 부분은 톨스토이가 인도의 변호사였던 간디와 죽을 때까지 서신을 교환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로인해 그의 비폭력 사상이 간디에게 전해지고, 간디에 의해서 실제로 실천된다. 

톨스토이는 비폭력, 금욕을 강조한 새로운 기독교를 주장했는데, 이는 '톨스토의주의'라고 불리며 많은 추종자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죽을 때까지 이상과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글쓴이는 이와 같은 톨스토이의 삶을 설명하는 데 영국의 정치학자 이사야 벌린을 인용한다. 벌린은 “여우는 잡다한 것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굵직한 것 하나를 안다"라는 그리스의 속담으로, “내가 제안하고자 하는 가설은, 톨스토이가 천성적으로는 여우지만, 그 스스로는 고슴도치라고 믿었다는 것이다.”라는 주장을 했다. 그리고 글쓴이는 이에 동의하며, "그가 타고난 재능은 작가에게나 어울렸지 성인(聖人)에게 어울리진 않았다."라고 말한다. 문학가로서 톨스토이는 뛰어났지만, 이상을 삶으로 실천하는 그릇은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신 그의 생각은 '간디'라는 또 다른 사람의 삶에서 구체화되게 되었다. 

성공한 삶과 실패한 삶의 구분이 모호하다. 이상을 삶으로 살아내지 못한 톨스토이의 삶은 실패했는가? 이상을 살아낸 간디는 톨스토이보다 위대한가? 실제로 톨스토이는 성욕과 도박욕에 시달리고 굴복하며 자괴감에 빠지기를 반복했지만, 이와 같은 처절한 모순의 경험은 그의 작품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의 완벽하지 못한(?) 삶이 그의 작품의 가치를 격하시키지는 않는다. 비록 괴롭게 살았지만, 문학이라는 수단을 통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분명하게 했다.

해야할 것, 하지말아야 할 것 등 사회 문화적 풍속과 규범만을 잘 따르고 지켜나가는 것이 삶이라면, 인간의 삶은 전통, 질서를 강화 유지하는 수단이 되어버린다. 나는 역사를 잘 모르지만, 인류 역사에서 위대한 사건은 대부분 변혁을 동반한 것 같다. 때문에 '사회적 시선'으로 자신의 잘남과 추함을 판단하는 것은 조금 어리석다. 외부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은 자기가 마땅히 해야할 일을 놓치게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나는 왜, 없지 않고 있는가?" 이 질문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에 깊은 울림이 있다. 이 물음은 사회적 시선에 응답하는 삶을 뛰어넘게 한다. 이 물음은 지금 내가 지금 숨 쉬고 있는 이유와 의미를 발견하도록 돕는다. 이 물음은 신께서 나에게 허락한 삶을 찾아가는 여정을 지속시킨다. 어리석은 판단이나 끓어오르는 욕망에 굴복하는 순간이 있을지 모른다. 어려운 상황에 원망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은 고유하다. 그 순간들이 이어져서 세상에 유일한 궤적을 그려낸다. 이는 태어날 때부터 계획할 수 없다. 계획을 해도 의도치 않은 만남과 사건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수시로 변경된다. 궤적을 그리는 일은 우리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 

지금도 주변에서는 수많은 소리들이 들린다. 그 소리들은 피가 될 수도 살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결코 온전한 하나의 존재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나는 왜, 없지 않고 있는가?"에 대한 답, 그것이 바로 살아가야 할 삶, 고유한 궤적이며, 톨스토이고 간디이며, 너이고 나.